영락제와 세조: 찬탈을 둘러싼 두 남자의 평행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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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통해

군주가 될 운명을 타고난 조카 단종을 내쫓은

문제적 남자 세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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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와 마찬가지로 조카를 내쫓고 왕위에 오른 리처드 3세)




세조에 관한 평가와는 상관 없이,

자신의 권력을 다져야 하는 군주와 그의 친척들의 관계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러모로 불편한 관계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중 특히 세조가 군주와 왕족 간 갈등의 대명사로 회자되는 이유는

찬탈로써 국가적 질서를 본인의 입맛대로 재편했기 때문이다.

한편, 세조가 즉위하기 약 50년 전중국에서도 이와 비슷한자가 등장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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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명나라의 3대 황제 영락제 주체였다.

영락제 역시 세조와 마찬가지로황제가 될 운명을 타고나지는 않았으나

찬탈을 통해 정통성을 갖춘 조카를 내쫓고 본인이 황제의 자리에 올라

아버지이자 명나라를 건국한 홍무제 주원장과는 다른본인의 비전을 심었고,

결과적으로 본인의 치세 전후로 명나라의 성격은 꽤나 달라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두 남자는 얼마나 비슷하면서도 달랐을까?

군주로서 영락제와 세조가 가진 공통점과 차이점을 살펴보자.

1. 능력 있는 아들들이 찾아낸 찬탈의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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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대군이 석가모니의 삶을 훈민정음으로 기록한 책인 석보상절.)



세조는 부왕 세종의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본인의 능력을 발휘했던 왕자였다.

그리고 아버지 세종, 어머니 소헌왕후, 형 문종이 모두 사망하고

어린 조카 단종만 남아있는 틈을 노려 찬탈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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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년 당시 북원과 명이 대치하던 상황의 지도.)

영락제 역시 아버지 홍무제에게는 나름대로 든든한 아들이었다.

홍무제 시기 명나라는 건국 직후의 혼란을 수습해야 하면서도

만리장성 이북으로 축출된 몽골 세력의 남하를 견제해야 할

안보 상의 리스크를 안고 있었다.

결국 당시 명나라는 강남 지방인 남경(난징)에 수도를 뒀음에도

멀리서 몽골족을 마주보던 화북 지역의 군사력을 신경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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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청과 불신의 아이콘이나 다름 없던 홍무제는

공신들 대신 그나마 자신이 믿을 수 있는 자식들을 번왕(藩王)으로 임명해

지방의 군사력을 담당하게 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다만 아들들마저도 완전히 믿기 힘들어서인지

번왕들은 지방에서 제한적인 군권만 가졌을 뿐,

지방 행정에 관여하는 것이 원칙적으로 금지되기는 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뛰어난 무력으로 아버지의 성공을 뒷받침한 4남 주체는

연왕(燕王)이라는 이름으로 북평(北平, 지금의 베이징)을 맡고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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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내몽골과 베이징 사이의 거리는 나름 가까운 편에 속한다.)




북평은 과거 원나라의 수도였으면서도 몽골과 명이 대치하는 지역의 거점이라는 점에서

홍무제는 주체에게 큰 기대를 걸고 최전방의 안보를 맡겼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주체에게는 생각보다 빨리 찬탈의 기회가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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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적으로 주체는 홍무제의 황후 마씨의 소생으로 기록되어있으나,

첩의 소생이면서도 찬탈 후 본인의 주도로 실록이 개정되면서

마씨의 소생으로 바꾼 것이 아니냐는 의문점은 남아있다.)

1392~98년 사이 주체의 세 형인 황태자 주표, 2남 주상, 3남 주강이 연달아 사망했고

거기에 1398년 아버지 홍무제까지도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사망 전 황태자를 비롯한 아들들을 연달아 떠나보낸 홍무제는후계자 문제를 두고

주체와 주표의 장남이자 장손 주윤문 사이에서 고민을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아무쪼록 홍무제의 뒤를 이은 것은 주체의 조카 건문제 주윤문이 되었다.

(홍무제의 선택은 계승 분쟁으로 인해 쇠락한 원나라를 반면교사로 삼으면서도

한족, 유교적 전통을 통해 국가의 기틀을 지키려는 의도로 해석할 수 있다.)

만 10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정치적 능력을 보여주지 못한 단종과는 달리

건문제는 만 21세에 즉위하여 마냥 어리고 생각 없는 황제였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건문제와 남경의 관료층은 번왕 한 명 한 명의 직위를 박탈하는 삭번 정책으로

황권을 공고히 하면서 숙부이자 가장 강력한 번왕이던주체의 입지를 위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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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는 동생들이 하나씩 정치적 숙청의 대상이 되는 것을 보며

그 절정에는 자신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

1399년 남경의 간신 제거를 명분으로 거병하면서 반란을 일으켜

정난의 변(靖難之役)이 시작되었다.

(결국 단종과는 달리 건문제는 숙부와의 갈등을

본인이 직접 심화시킨 꼴이 되는 것이었다.)

순식간에 끝난 세조의 계유정난과 달리,

정난의 변은 약 1,000km 정도 떨어진 북평과 남경 사이에서

무려 3년 동안 명 조정과 주체 사이의 공방이 오간 내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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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징의 명나라 황궁인 조천궁.)




빈약한 명분, 군사 & 경제적 규모의 차이 등 불리한 여건을 안고

전쟁을 시작한 주체는 뛰어난 무력으로 직접 전투에 참가했고,

그 결과 남경을 점령하는데 성공하여 명나라의 3대 황제 영락제로 즉위했다.

단종을 형식적으로 상왕으로 모신즉위 직후의세조와는 달리,

영락제는 남경 점령 직후 황궁에 불을 질렀고,

불타는 황궁 속에서 건문제는 행방불명되어 지금까지도 그 최후가 알려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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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가 폐지시킨 집현전 자리에 남아있는 경복궁 수정전.)

2. 본인 위주의 통치

앞서 말했든 세조와 영락제는 모두 정통성이 부족한 군주들이었기에

권력 강화 위주의 통치에 전력을 다했다.

그 결과로 세조는 공신들을 적극 활용한 왕권 강화를 통해

기존 조선의 군신관계와는 다른 양상을 보여 후대에 영향을 끼쳤다면,

영락제는 홍무제의 뒤를 이어 황제의 전제 권력을 크게 강화하면서도

홍무제가 지향했던 한족 중심의 정권에서 미묘하게 벗어나는 통치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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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락제의 이상이 담긴 자금성의 전경.)

그 대표적인 사례는 북경으로의 천도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북경으로의 천도는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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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지금이나 북경은 중국 땅에서도 동북쪽으로 치우쳐진 곳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런 점으로 인해 영락제의 천도 이전까지 북경을 수도로 삼은

한족의 통일 정권은 하나도 없었고,오히려 북경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거란, 여진, 몽골과 같은 비한족 정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락제가 천도를 강행한 이유로는

북경이 자신의 정치적 기반이었던 점도 반영되었을 수 있고,

강남의 한족 위주의 나라에서 벗어나 화북과 비한족의 영역까지도 아우르는 제국을 만들어

몽골족을 견제하려는 의식이 발현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 한 가지 사례로는 명나라의 외교 노선의 변화가 있다.

홍무제는 건국 이후 국내의 안정을 꾀하면서도 철저한 한족 위주의 정권을 지향하여

대외 진출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반면 영락제는 뛰어난 무력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대외 정책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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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무르 제국의 정복 군주인 티무르. 동시대를 살았던 영락제와 티무르는

외교 관계 악화로 서로를 상대할 수도 있었으나

24살 더 많은 티무르가 원정 중 사망하면서 성사되지는 못했다.)

영락제는 사망 전 약 10여 년에 걸쳐 몽골을 직접 상대하는 대외 친정에 참여했는데,

이와 같이 황제가 직접 몽골 지역까지 나가 전쟁을 벌이는

소위 막북 친정은 한족 황제로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었다.

(한족 통일 정권의 황제로서 친정에 나섰던 것은 수 양제와 당 태종이 대표적인데,

둘 다 선비족 혈통이 있는 것으로 보여지기는 한다.

참고로 이들의 공통적인 원정 상대는 고구려로, 그 결과는 알다시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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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 믈라카에 있는 정화의 동상.)

그리고 환관 정화(鄭和)의 이름을 통해 잘 알려진 해상 원정 역시

영락제의 주요 업적 중 하나인데,

이 역시도 홍무제의 성향과는 맞지 않는 사업이었기에

영락제는 본인만의 독특한 대외관을 정치에 적극적으로 반영한 황제라고 볼 수 있다.

(한때 원나라의 수도였던 북경으로의 천도, 적극적인 대외 원정과 무력 과시,

색목인 정화를 통해 원나라의 해상 역량을 활용한대규모 원정을 지원한 점에서

영락제는 오히려 쿠빌라이 칸과 통하는 점이 많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결국 세조와 영락제는 정통성의 한계를 넘어 찬탈로써야망을 이뤘다는 점에서 닮아 있다.

영락제는 수도 이전과 대외 원정으로 국가의 성격 자체를 바꿔버리면서

명나라를 사실상 다시금 건국한 황제가 되었다면,

세조는 상대적으로 기존의 틀을 유지하면서도

왕권을 강화하며 제도를 다지는 데 집중했다고도 볼 수 있다.

역사는 결국 사람 사는 이야기를 다루는 만큼,

비슷한 삶을 산 여러 인물을 비교해보는 것도

역사 공부의 재미가 아닐까 한다.

15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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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식이 38분 전
🌱 포천고등학교 38분 전
🌱 천하삼분찌개 38분 전
🌱 유진악개 38분 전
🌱 빔밤붐은온다 38분 전
🌱 람지다람쥐 38분 전
🌱 대콩밥 38분 전
🌱 ss99999k 38분 전
🌱 안녹산 38분 전
🌱 포천고등학교 38분 전
🌱 눈떠보니에펨 38분 전
🌱 어허왜이래 38분 전
🌱 유진악개 35분 전
🌱 루카즈하 35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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